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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2024년 사순절 묵상(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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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FMC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24-03-1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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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3.15.2024)

 

▨ 사무엘하14:12-33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성령의 임재

 

1.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는 아름다운 누이 ‘다말’이 있습니다. 

그런 다말을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암논’이 연애를 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연애하는 까닭에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본 ‘요나답’이라고 하는 간교한 친구가 다말을 취할 방법을 알려 줍니다. 

병든 채 하고 아버지 다윗이 ‘뭐가 필요한 것이 있느냐?’ 할 때 다말이 와서 시중들 수 있도록 요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다말이 암논을 시중할 때 암논은 다말을 억지로 욕 보이고 버립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다말은 재를 머리에 쓰고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에 얹고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지냅니다. 

압살롬은 그런 다말의 모습을 보면서 동생에 대한 복수를 생각했습니다.

 

두 해가 지났습니다. 

압살롬은 양털 깎는 축제를 핑계 삼아 아버지 다윗을 제외하고 다윗의 아들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고는 종들로 하여금 술에 취한 암논을 죽이게 해서 죽게 합니다. 

다윗이 이 일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은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을 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3년이 지나자 이미 암논은 죽었으니 어쩔 수 없고 도망 가 사는 압살롬을 생각할 때 다윗의 마음이 너무 안됐습니다. 

다윗은 날마다 압살롬을 생각하고 슬퍼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았던 ‘요압’이 드고아의 슬기 있는 한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어 자기 아들에 대한 어려운 사정을 비유로 이야기하게 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실 여인의 이야기는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눈치가 빨랐던 다윗은 자기와 압살롬의 이야기인 것을 알아채고 결국 요압에게 압살롬을 데려오게 합니다. 

그렇지만 압살롬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것 때문에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얼굴은 볼 수 없었습니다. 

압살롬은 두 해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다윗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요압을 아버지 다윗에게 보내어서 어떻게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지만 요압이 오지 않자, 압살롬은 종들로 하여금 요압의 보리 밭에 불을 놓게합니다.

그러자 요압이 금새 나타나서는 왜 불을 질렀느냐고 묻자, 압살롬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삼하14:32-33>

32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33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압살롬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다윗에게 나아갔고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2.

 

말씀의 내용이 긴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형 암논을 죽인 것 때문에 그술 땅에 내려가 사는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은 곧 죄인인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암논이 죽은 것 때문에 무척 슬퍼합니다. 

그런데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흘러서 슬픔은 잊혀져 갔고 대신 그술 땅에 사는 압살롬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들이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지내나?

힘들지는 않은가?

보고 싶고 그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 때문에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음을 알았던 요압이 나섭니다. 

그리고 드고아 출신의 슬기 있는 여인에게 할 말을 넣어 주고 다윗 왕에게 가서 말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이 참 기가 막힙니다. 

<삼하14:13-14>

13여인이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도모를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셨으니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내어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아니 하심이니이다 

14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쫓긴 자로 하나님께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어쫓긴 자를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하면 그것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던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또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책을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요압으로 하여금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려오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 만도 대단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압살롬, 그렇지만 그는 자기 집으로 물러가 있고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만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과 같이 교회만 나오는 것으로 다가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지도 두 해나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아버지 다윗에게 전달하고자 했지만 요압은 불러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이 종에게 이르기를 가까이 요압의 밭이 있고 거기에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놓으라 했습니다. 

종들이 압살롬의 말을 따라 요압의 보리 밭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에 오게 됐습니다. 

“왜 불을 질렀느냐?”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다”라고 하게 하고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결국 요압은 압살롬의 이 말을 아버지 다윗에게 가서 전했고, 마침내 다윗은 압살롬을 부르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압살롬은 다윗 왕께 나아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고 아버지와 입을 맞추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요압과 같은 중보자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 성령님께서 죄인인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일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가슴이 뜨거워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옥스포드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됐습니다. 

그러나 성령 체험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사역을 갔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실패한 후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가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데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무척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찬송과 기도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거센 풍랑가운데서도 어떤 두려움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웨슬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당신들은 이 폭풍우가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하나님을 믿기에 어떤 폭풍우도 두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신앙이 웨슬리 목사에게 큰 도전이 됐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모라비안 교도들입니다.”

 

‘모라비안 공동체’의 모라비아란 이름은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동쪽에 있던 지명이며 그 어원은 그 지역 북서부에 있는 모라바(Morava) 강에서 유래 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15세기 초에 종교 개혁자 ‘존 후스’(John Huss)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존 후스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 예를 들어 면죄부를 발행 한다든지 혹은 성직자들의 부패를 지적하며 개혁을 시도했다가 화형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1467년 이름을 ‘형제 교회’라고 개칭했고, 16, 7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제도를 거부함으로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722년에 90명의 신도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탄압을 피해 독일 작센 지방으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젊은 경건주의자인 ‘진젠도르프’ 백작으로부터 드레스텐(Dresden) 근처의 영지(領地) 한 부분을 제공 받아 거하게 됩니다. 

4년 후인 1726년에는 그 수가 300여 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그곳을 ‘헤른훗’(Herrnhut)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진젠도르프는 이드에게 피난처만 제공하고 이들 정착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점차 그들의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모라비안은 경건한 신앙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 목사는 계속해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지도자인 ‘피터 뵐러’라고 하는 목사와 신앙적인 교제를 갖게 됩니다. 

“나는 목사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계속해서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에 대해 말씀을 준비 하시고 믿음에 대해 계속해서 설교하시기 바랍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피터 뵐러 목사의 권면을 따라 믿음에 관한 말씀을 준비하여 계속해서 믿음에 관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감리교에서는 이 날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올더 스케잇이라고 하는 거리에 있는 한 건물에서 집회가 열렸고, 웨슬리 목사님도 그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럴 때 구두 수선공으로 여겨지는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어 내려갔는데, 그 가운데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웨슬리 목사님의 마음이 순간 뜨거워지는 성령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구나!”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 웨슬리 목사님, 그 다음부터 말을 타고 다니면서 탄광 촌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전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들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모임을 위해 큰 건물이 필요하게 됐고, 건물을 구입하기 위한 재정확보로 속회에서 헌금을 내게 됐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급성장을 하게 됐고, 그러므로 오늘날 전 세계에 감리교회가 확산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4.

 

오늘 말씀의 핵심은 결국 우리들 모두도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년 만에 압살롬은 그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별 어려움이 없고 흠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을 다말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유가 암논에게 욕을 당한 동생 다말과 같이 딸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지척에 아버지 다윗을 두고도 아버지를 볼 수 없으니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22:21-30> 말씀을 읽어 드렸는데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모든 복이 있는 것입니다. 

21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24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25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26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28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29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30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교회만 오고 가는 것으로는 기쁨도 능력도 없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릴 때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찬송,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경험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들 기도할 때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어느 때는 통회하고 자복하고, 한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과 내 자신의 마음이 통하는 기도를 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기도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성령 받고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삶의 여러 가지 일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밤에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뜨겁게 부르짖어 기도하심으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의 역사를 경험하시는 복된 믿음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되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의 임재로 그 능력을 경험하고 영광이 되는 믿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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