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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2024년 사순절 묵상(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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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FMC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4-03-0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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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3.1.2024)

 

▨ 사무엘하12:15b-25

 

두 아이를 통해 얻는 교훈<삼하12:15b-25>

 

15 …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훼상하시리로다 함이라 19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20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21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22가로되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23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24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1.

 

‘우리아’의 처가 ‘다윗’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이를 치셨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는 심히 앓습니다. 

다윗이 그런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아이는 이레 만에 죽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는 음식을 먹습니다. 

이후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동침해서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과 연관해서 뜻이 ‘평화’ 혹은 ‘평화로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셨습니다. 

그 으미가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라는 뜻이었습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얻는 교훈입니다.  

첫째 아이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 이끌려서 낳은 아이였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보고 취해 아이를 갖게 됐고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행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 맨 앞자리에 내세워 화살에 맞아 죽게 하는 간접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죄 가운데 태어난 아이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이를 치셨고 심히 앓다 이레 만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6장>에서 우리가 구원 받기 전, 곧 죄의 종으로 살 때 죄가 요구하는 바를 따라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롬6:21>에 이르기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았을 때는 부끄러움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익히 하는 말씀을 합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얻은 아이를 치심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보여 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이를 치신 것 때문에 심히 앓았다고 했는데, 다윗은 그런 아이를 위해 밤새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봐 왔지만 다윗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셨던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기도에 전혀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진리를 엄격하게 적용하셔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어떤 작은 죄도 범해서는 안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잠6:27-28> 말씀을 보면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불을 품게 되면 옷이 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마음에 죄를 품게 되면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발전해서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욕심이나 미움, 시기 그런 것들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보다는 좋은 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 마음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가 죄의 삯은 사망임을 잊지 마시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마음, 그리고 삶에서 악은 그 어떤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으신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얻는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거듭난 두 번째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아이는 하나님께서 치셔서 앓다 이레 만에 죽었고, 두 번째 낳은 아이,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직접 나단 선지자까지 보내셔서 그 이름을‘여디디아’ 곧 야웨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라고 까지 말씀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게 되면 아이를 낳은 여인을 성경이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이가 낳을 때 그 때의 밧세바를 성경은 ‘우리아의 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유독 ‘우리아’가 ‘헷’ 사람이라는 것이 반복해서 밝힙니다. 

‘헷’ 사람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일곱 이방 민족 가운데 한 족속입니다. 

대표적인 육에 속한 족속이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면 반드시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던 족속이었습니다. 

<삼하12:15b>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 그러므로 이 아이는 곧 육의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을 낳았을 때는 말씀이 전혀 다릅니다. 

<삼하12:24>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이 부분에서 성경은 밧세바를 ‘다윗의 처’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아가 죽자 다윗이 밧세바를 자기 아내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참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 때에 이스라엘은 최강의 나라가 됐고, 또  아버지 다윗이 그렇게 짓고자 했던 성전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그것 만이 아니라 솔로몬은 말년에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은 참으로 많은 복을 받은 복된 왕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첫째 보다도 둘째를 유독 사랑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은 ‘이스마엘’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마엘 보다도 둘째 ‘이삭’을 사랑하시고 기업의 복을 잇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이스마엘은 사라의 몸 종 ‘하갈’을 통해 얻은 육의 자식입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100세에, 다시 말해 육신의 능력으로 난 자식이 아니라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어 믿음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예가 또 있습니다. 

이삭에게도 쌍둥이 두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에서’이고 둘째 아들은 ‘야곱’ 입니다.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보다도 둘째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에서는 온 몸이 붉은 그러면서 사냥을 즐겨하는 육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이고 복입니까?

그런데 그런 장자의 명분을 에서는 고작 한번 먹고 그칠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립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둘째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말이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순종하는 영에 속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 이 땅에서의 삶이 다 마쳐갈 때 야곱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고 실제로 이삭의 축복은 야곱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두 아들을 낳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야곱이 이 땅에서의 생명을 다할 때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합니다. 

요셉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첫째가 큰 복을 받게 하고 싶어서 야곱의 오른 손을 첫째 므낫세에게 얻고 왼손은 에브라임에게 얹습니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오른손은 능력과 영광, 최고의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 야곱이 애써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에게 얹고 왼손을 첫째 므낫세에게 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다시 손을 옮기려고 하는데 야곱이 하는 말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 보다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그리고는 두 자녀를 축복합니다. 

이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져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의 주된 지파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두번째를 축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예가 첫번째 ‘아담’은 죄로 인해 실패했지만,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첫번째 아담이 죄로 인해 실패했던 것을 십자가로 이기시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 십자가에서 첫번째 육의 사람이 죽고, 그리고 빈 무덤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두 번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시고 심지어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여디디야’ 자신의 사랑하심을 더욱 확증해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복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고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고 경험하는 복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다시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대답은, 

<요3:5-7>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물과 성령,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런 두번째 거듭 태어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다닐 때 또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믿음의 삶이 되심으로 솔로몬, 다시 여디디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는 복된 믿음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요즘 하나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시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늘 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했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 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하늘 문이 막히게 되면 모든 것들이 다 막히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렸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기 때문에 하늘의 복이 땅에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고 응답의 역사가 열린 문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막히게 되면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이 루스에서 돌 배게 하나는 베고 자다가 꿈에 하늘이 열린 것을 보게 됐습니다. 

사다리가 하늘에서 땅에 닿았는데 그 사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의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까?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었던 나다나엘과 같이, 그리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셨던 예수님과 같이 예수 십자가 안에서 육의 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옛 사람이 죽고, 그리고 예수님의 빈 무덤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두번째 새 사람으로 거듭나 하늘 문이 열려 하늘의 복을 받으시는 복된 믿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내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로 거듭나서 하늘 문이 열린 복된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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